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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j 특별기획] 미국 남북전쟁 150주년, 전쟁 의지가 평화를 보장한다

jeje7277 2013. 2. 5. 16:41

[중앙일보] 입력 2011.06.18 01:30 / 수정 2011.06.18 01:30

“남북전쟁 모르면 오늘의 미국 알 수 없다”
링컨, 잔혹하게 전쟁 수행 … 승리 뒤 반역 책임 묻지 않았다
내전 뒤 연방 재통합 … USA, 복수서 단수로 바뀌었다


내전(內戰·Civil War)은 피의 잔혹사다. 적개심과 증오감은 외국과의 전쟁보다 거칠다. 내전의 악마적 속성이다. 6·25 한국전쟁, 스페인 내전도 처절했다. 19세기 중반 미국은 내전에 돌입한다. 북부(연방·Union)와 남부(연합·Confederacy) 주(州)들 간의 전쟁이다.

그 전쟁(1861~1865) 4년간 62만 명이 전사했다. 20세기 전쟁 (1차·2차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전체의 미군 전사자를 합한 것보다 많다. 폭격기·탱크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주검의 무게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올해가 남북전쟁 발발(勃發) 150주년(Sesquicentennial)이다. 요즘 미국에선 기념행사, 재연(Reenactment) 이벤트가 풍성하게 벌어진다. 미국 역사학자 셸비 푸트(Shelby Foote)는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의 정수(精髓), 국가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그 전쟁을 모르면 오늘의 미국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박보균 편집인

 

전쟁은 낭만적으로 시작됐다. 1861년 4월 12일 새벽 첫 포탄이 발사됐다. 장소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섬터 요새(Fort Sumter). 찰스턴 항구에서 1.6㎞ 앞의 작은 섬(200X180m)에 만든 요새다.

 그 요새는 북군 주둔지다. 남부 연합 정부는 90명의 북군에 철수를 요구했다. 건너편 항구에서 남군은 대포를 쏘아댔다. 3000여 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36시간 뒤 북군은 항복했다. 요새는 파괴됐지만 사상자는 없었다. 찰스턴은 승리를 축하하는 퍼레이드로 북적댔다. 사망 없는 첫 전투와 퍼레이드는 전쟁의 환상을 심었다. 남북 어느 정부도 잔인하고 지루한 유혈(流血)의 무대가 개막됐다고 예감하지 못했다.

 전쟁 전야는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등장으로 깊어갔다. 1860년 11월 대선에서 그는 연방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시골 변호사 출신 링컨의 당선은 행운이었다. 대선 이슈는 노예제 존폐였다. 흑인 노예는 남부 노동력의 근간이다. 링컨은 노예제를 반대했다. 급진적 폐지론자는 아니었다.

 남부는 링컨을 거부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미국 연방에서 처음 탈퇴(secede)했다. 최종적으로 남부의 11개 주가 떨어져 나갔다. 1861년 2월 남부는 나라를 새로 세웠다(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링컨의 대통령 취임 전이다. 대통령(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도 뽑았다. 웨스트포인트 육사 출신의 데이비스는 국방장관을 거쳐 연방 상원의원이었다. 미국은 수도 워싱턴을 경계로 위와 아래로 분열됐다. 링컨은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를 헌법 파괴의 ‘반란’으로 단정했다. 하지만 링컨의 권한은 북부(19개 주) 대통령으로 축소됐다.

 지금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가면 남부 연합의 분위기가 건재하다. 주도(州都) 컬럼비아의 정부 청사 광장에 높이 20m짜리 깃대가 서 있다. 거기에 아직도 남부 연합 국가의 깃발이 걸려 있다. X자 모양의 십자가에 13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남부 역사의 진원지임을 과시한다.

게티즈버그(펜실베이니아주) 전투는 사흘간 5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게티즈버그 연설 장소 부근에 세워진 링컨 흉상과 당시 북군의 대포.

 섬터의 항복은 워싱턴을 긴장시켰다. 링컨은 정부를 전시체제로 바꿨다. 지휘관 발탁은 우선순위였다. 링컨은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로버트 리에게 연방군 사령관(소장) 자리를 제의했다. 나이 52세의 대령. 리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링컨의 노선을 인정했다. 하지만 리는 거부했다. 고향 버지니아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때문이었다. 버지니아주는 연방을 탈퇴했다. 링컨(16대) 이전까지 15명의 대통령 중 7명이 버지니아 출신이다.

 버지니아의 그런 상징성은 남부의 위상을 강화했다. 남부 연합 정부는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를 수도로 삼는다. 워싱턴~리치먼드 사이 100마일(160㎞)이 주요 전투장이 된다.

 리는 워싱턴을 떠난다. 지금의 알링턴(Arlington) 국립묘지 자리는 리의 땅이었다. 북부 군대가 그의 집과 정원을 점령해 묘지로 만들었다. 알링턴 국립묘지 언덕에 리의 집이 남아 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묘소 위쪽이다.

 북부의 정치인·언론인들은 섬터의 패배를 설욕해야 한다고 흥분했다. 3개월 뒤 전쟁의 본격적인 막이 오른다. 1861년 7월 버지니아주 매너서스(Manassas)-. 워싱턴에서 서남방 20마일쯤 떨어진 곳이다. 북부는 불런(Bull Run) 전투라고 부른다. 여전히 전투 호칭도 다르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역사단체, 기념사업회들마다 매너서스 전투 150주년 행사의 준비가 한창이다. 지난 5월 말 매너서스 근처 한 마을의 준비 모임을 찾아갔다. 남군으로 나갈 역사체험 요원(re-enactor) 80여 명이 모여 있다. 남군 색깔인 그레이(gray) 군복에 머스캣 소총을 들고 있다.

 그들은 토머스 잭슨(Thomas J. Jackson) 부대 요원이다. 잭슨 부대는 스톤월(Stonewall·장벽)이라는 무적의 신화를 가졌다.

 매너서스 국립 전적지 공원에 가면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여기 잭슨이 장벽처럼 버티고 있다’. 그 글귀는 잭슨의 전설을 압축한다.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유인하고 기습하라’는 게 그의 용병술이다. 그것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게릴라 전법과 비슷하다.

 준비행사는 중대 지휘관(대위)을 뽑는 것으로 시작했다. 선출된 사람은 헨리 로런스(53세). 전직 도서관 사서다. 그에게 물었다.

●지휘관을 투표로 뽑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부 장교들 대부분이 대령까지 투표로 뽑혔다. 부대원들은 자신의 생명을 책임질 지휘관의 선출이기에 아주 신중했다. 생존본능이 발동된다. 때문에 가장 유능한 장교가 뽑힐 수 있다.”

 그가 “어텐션(attention·차렷)” 하고 부대원들을 정렬시킨다.

 “북부의 양키(Yankee)들이 미국의 건국정신을 망쳤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주 자치권을 중시했다. 연방 탈퇴는 주정부의 독자적 권한이다. 링컨은 연방정부에 권력을 집중시키려고 음모했다. 총을 들어라.” 그의 훈시는 전쟁 때 남군의 대의(大義)명분이었다.

 이어서 큰소리로 “레프트 페이스(left face·좌향좌)” “포워드 마치(forward march·앞으로 가)”를 외친다.

 어깨를 맞댄 밀집 형태의 전진이다. 횡대 15명씩 총검을 꽂은 채 나아간다. 나팔소리와 함께 “차-즈(charge·돌격)” 하는 함성.

 “밀집 대형은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서다. 1815년 나폴레옹 시절의 대형이다. 50년 후 남북전쟁의 기본 전술이었다. 하지만 무기는 발전했다. 총의 사정거리가 4배(400야드)로 늘었다. 대포의 위력은 커졌다. 때문에 그런 대형은 치명적인 대량 학살을 초래한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1. 남북전쟁 때 죽음의 결전이었던 게티즈버그 전투. 그 3일간의 전투가 미국의 운명을 결정했다. 남북 기병대원으로 분장한 재연 행사자들이 근접전을 펼치고 있다.

 

2. 그레이 복장에 머스캣 소총을 지닌 남부연합군 재연 요원들. 남부는 대령까지의 지휘관을 부대원 투표로 뽑았다.

 

3. 남부연합 대통령 데이비스의 백악관. 1818년 건축된 건물로 리치먼드에 남아 있다.

 

4. ‘매너서스 패배로 북부는 충격에 빠졌다’. 전투는 단기전의 낭만적 희망을 깼다(당시 신문기사).

 

5. 종전 138년째인 2003년 남부 수도였던 리치먼드에 처음 세워진 링컨의 동상. 북군의 리치먼드 점령 때 막내 아들 테드와 이곳에 함께 왔던 장면을 묘사했다.

 

 매너서스 전투는 행락객들과 함께 시작했다. 시민들은 전투 소식을 연극의 전쟁놀이로 연상했다. 전투 현장에 몰려갔다. 마차에 소풍 도구를 실었다. 착각은 깨졌다. 북군은 5000명의 군대를 동원했지만 참패했다. 구경꾼들은 피 흘리는 부상병들의 모습을 보았다. 전쟁이 잔인한 살상극임을 깨달았다.

 그 지휘관은 덧붙인다. “링컨, 데이비스 모두 길어야 6개월 정도의 단기전쟁으로 여겼다. 일반 군인들도 처음엔 전쟁을 낭만적으로 접근했다. 새로운 삶의 경험으로 여겼다. 애국심도 충만했다. 모험심과 애국심으로 전선에 나갔다.”

 워싱턴은 충격에 빠졌다. 신문은 "남부 반란(Rebel)군에게 블루(blue·북 군복 색깔)의 전사들이 패퇴했다”고 전했다. 링컨은 재기를 모색했다. 그 이후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된다. 죽음은 홍수처럼 쏟아졌다. 메릴랜드주의 앤티텀(Antietam) 전투 때 단 하루의 사상자가 남북 합해 2만5000명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전쟁은 교착상태가 된다. 국력에서 북부는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남부는 인구(900만, 북부 1900만), 공업생산력(1대 11)도 열세였다.

 그럼에도 전선에선 남부가 대체로 우세했다. 전쟁 승패는 국력·전투력·외교력의 결산이다. 전투력의 핵심은 영웅적 리더십이다.

 리는 부하들의 애국심을 동원하는 역량을 지녔다. 리는 그들의 충성과 열정을 추출했다. 리의 리더십은 남부의 열세한 국력을 메워줬다. 리는 프레데릭스버그, 2차 매너서스 전투에서 승리한다. 거기에다 솔선수범, 자애심, 책임감이 더해져 그의 신화는 강화된다.

 교착상태는 남부에도 고민이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 국력이 큰 쪽(북부)에 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리 장군은 회심의 전략 카드를 꺼냈다. 수도 워싱턴을 위에서 압박했다. 1864년 6월 말 리는 7만5000명(북버지니아군)을 이끌고 펜실베이니아로 들어갔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개막된다.

 리의 전략은 정공법이었다.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게 최선”이라는 손자병법과 다르다. 명쾌하고 직설적이다. 손자병법의 우회, 매복, 야간 기습에 익숙하지 못했다. 청교도 문화는 전략적 감수성을 억제했다. 중세 기사도적 접근은 사병들의 과도한 희생을 초래한다.

 병사들은 돌격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군인들의 용맹성은 무모할 정도다. 남북 모두 정의가 우리 편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이 죽음보다 두려워한 것은 비굴, 겁쟁이(coward)라는 말이었다. 엄폐물에 숨거나 엎드려 쏴 자세 자체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겼다.”

 리는 게티즈버그에서 패한다. 3일간 전투에서 남북 합해 5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남북의 각 주들은 1000여 개의 위령탑· 추모비·동상을 세웠다. 링컨의 흉상도 있다. 거기에 그의 게티즈버그 연설문이 조각돼 있다.

 링컨은 말의 위력을 알았다. 리더십의 언어는 대중의 상상력과 비전을 장악한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그 사례다. 3분짜리 연설은 272개의 짧은 단어로 구성됐다.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켜야 한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로 끝난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인권·평등의 지배 언어가 됐다. 이라크 침공 때 내건 조지 W 부시의 ‘자유의 확장’은 여기서 출발한다.

 전황은 다시 교착상태였다. 링컨은 자신의 전쟁철학을 실천할 지휘관을 찾았다.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와 윌리엄 셔먼(William T. Sherman)이다.

 링컨은 그랜트를 최고사령관(중장)으로 임명한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이래 중장은 처음이다. 그랜트와 셔먼은 오하이오주 출신이다. 지금까지 오하이오는 버지니아 다음으로 많은 대통령(7명)을 배출했다.

 1864년부터 전선의 주역은 그랜트와 리로 바뀐다. 버지니아주의 윌더니스, 스팟실베이니아, 콜드하버에서 두 사람은 대결했다. 콜드하버에서 북군은 20여 분 공격 동안 7000명의 희생자를 냈다. 돌 진지를 향한 무모한 진격명령 때문이다. 그랜트는 연패한다. 그의 전술은 도살(屠殺)장으로의 초대장이었다.

참담한 피해로 북부에서 전쟁회피 분위기가 번졌다. 그해 링컨은 대통령 재선에 도전했다. 유권자들은 야당의 평화 협상론에 기울었다. 링컨은 낙선의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링컨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휴전으로 얻은 평화는 위선적이며 다시 깨진다는 게 링컨의 확신이었다. 철저한 승리의 전쟁의지가 정의롭고 완벽한 평화를 보장한다는 믿음이다. 전쟁과 평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그의 통찰이다. 링컨은 그랜트식 소모전의 불가피성을 인정했다.

 링컨의 냉혹한 전쟁관은 본격적으로 실천된다. 버지니아 전선에서 그랜트가 리를 붙잡는 동안 셔먼은 남부 깊숙이 진격했다. 셔먼의 초토화 작전은 잔인했다. 그는 남부의 심장부 조지아주의 애틀랜타를 불질렀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장면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도 파괴했다. 남부 주민들은 몸서리쳤다. 남부의 항전의지는 무너진다.

 셔먼의 승전보는 선거 분위기를 바꿨다. 링컨의 인기는 올라갔고 다시 당선된다. 그것은 리더십의 일관성 덕분이다. 국정의 원칙과 소신을 유지하면 위기관리에 성공한다.

 워싱턴은 동상의 도시다. 동상은 전공(戰功) 순서대로 배치했다. 제1공훈자인 그랜트의 동상은 연방 의사당 앞을 위압적으로 장식한다. 셔먼 동상은 백악관 정문 왼쪽에 있다. ‘완벽한 평화’의 깃발은 베트남 전쟁에서 등장한다. 월맹 국방장관 보 구엔 지압의 지론이다. 지압의 전쟁의지는 미군을 패퇴시킨다.

 

(위)1865년 4월 그랜트와 리의 항복 조인식 장면.

 

(아래)남부 대통령 데이비스가 체포됐을 때 소지했던 권총(1851년 콜트 리벌버).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드라마가 펼쳐진 곳.” - 리가 그랜트에게 항복한 곳인 애포머톡스(버지니아주)의 안내문이다. 항복 장소에 승자의 환희, 패자의 절망감을 담은 어떤 기념비·전적비도 없다.

 

 1865년 들어 남부의 전력은 바닥이 났다. 데이비스 대통령의 남군 정부는 전의를 상실했다. 그해 4월 리는 그랜트에게 항복한다. 버지니아주의 애포머톡스(Appomattox)-. 남군의 항복 장소다.

 애포머톡스가 드러내는 종전(終戰)의 이미지는 파격 그 자체다. 그곳엔 그 흔한 동상, 전적비나 기념비가 없다. 빛바랜 안내판이 관람객을 맞는다. “이곳에서··· 리와 그랜트 그리고 그들의 피곤한 군대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드라마의 하나(One of the Great Dramas)를 연출했다.”

 그 글은 승자의 환희와 패자의 절망감을 철저히 배제했다. 링컨은 남부를 ‘체제 반역’으로 규정했다. 62 만 명이 죽은 전쟁이다. 그렇다면 반역의 주동자를 전범 재판에 세우는 게 역사의 통상적 관례다. 그러나 애포머톡스는 그런 상식을 깬다. 양쪽 사령관 그랜트와 리 장군의 항복 협정문은 간단했다. “남군은 포로 서약을 한 뒤 법을 어기지 않는 한 반역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장교는 허리에 차는 무기(권총)와 말을 소유할 수 있다.” 대사면(大赦免)이었다. 링컨의 종전 정신이다. 그는 관용과 통합을 전후의 시대정신으로 제시했다. 반목과 원한의 감정을 재생산할 수 있는 어떤 기념비도 그 후에 세우지 않았다.

 링컨은 완벽한 승리를 위해 잔혹하게 남군을 몰아세웠다. 그리고 항복을 받았다. 그런 즉시 대사면을 베풀었다. 그 거대하고 파격적인 반전(反轉) 속에 링컨의 위대함은 존재한다. 그 대전환은 장엄한 서사시(敍事詩)적 감동이다.

 리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체포나 처벌받지도 않았다. 대학총장(버지니아주 렉싱턴의 워싱턴 대학)으로 새 삶을 보냈다. 데이비스는 반역의 수괴(首魁)가 돼버렸다. 그는 항복하지 않고 탈출했다. 그리고 반역(treason) 혐의로 체포됐지만 반역과 관련한 처벌은 없었다. 그는 2년 뒤 보석금을 내고 석방된다. 전범(戰犯)이 없는 전쟁, 반역을 응징하지 않은 내전-. 애포머톡스의 컨셉트는 내전 이후 국가 재통합의 롤모델이다. 전후 처리의 철학과 방식은 분단 한국의 벤치마킹 대상이다. 링컨은 남부 항복 5일 뒤 암살당한다.

링컨은 현실주의자였다. 그의 노예해방 정책에서 실감된다. 1862년 9월 선포한 노예 해방령의 실제적 효과는 미약했다. 우선순위는 연방 재통합이었고 그 틀에서 노예 문제를 다뤘다.

 

애틀랜타(조지아주)의 스톤 마운틴(Stone mountain) 바위에 새겨진 남부연합의 간판 3인. 데이비스 대통령, 리, 잭슨 장군(왼쪽부터). 산중턱(120m 높이)에 미식축구장 3개 크기의 거대한 조각이다. 계획부터 완성까지 60년이 걸려 1972년 완성됐다.

 그러나 전쟁의 후유증은 아직도 꿈틀거리며 남아 있다. 링컨은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뽑힌다. 하지만 남부에선 푸대접을 받는다. 리치먼드 중심가에는 데이비스의 동상이 서 있다.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 비슷한 규모다. 리와 잭슨의 동상도 그 거리를 압도한다.

 하지만 링컨 동상은 왜소하다. 그의 신체 크기 정도다. 2003년에 남북전쟁 전적지 공원에 세워졌다. 놀라운 사실은 남부 주 전체에서 최초의 동상이라는 점이다.

 남부 대통령의 백악관이 리치먼드에 남아 있다. 그 옆에 박물관이 있다. 그곳의 대통령 집무실에 데이비스의 대형 초상화가 남부 연합 깃발과 함께 걸려 있다. 그 방은 남부의 전설과 자존심을 과시한다. 박물관 컨셉트도 남부의 정신을 재생시키는 데 있다. 전시장에 남부의 아이콘인 리와 잭슨의 대형 초상화가 눈길을 끈다.

 안내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전의 상처는 원한과 미움의 DNA로 전이돼 오랜 세대에 걸쳐 기억된다. 남부에서 링컨 동상은 거의 없다. 링컨의 비정한 남부 정복 때문이다. 내전이 남긴 정신적 상흔은 기묘하게 지속된다.”

 한국도 내전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 역사관 논쟁은 6·25 내전의 상처다.

 리치먼드의 링컨 동상은 소박하지만 강렬하다. 동상을 에워싼 돌담에 ‘나라의 상처를 꿰매자(to bind up the nation’s wounds)’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의 재선 취임 연설문(“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말고···정의의 이름으로 나라의 상처를 꿰매자”)에서 따왔다.

 전쟁 이전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미 합중국)는 복수(are)였다. 주(州)의 연합체라는 인식에서였다. 그러나 전쟁 후는 단수(is)로 바꿨다. 전쟁은 나라의 일체감, 국민적 동질감을 단련시킨다. 남북전쟁은 미국을 새 출발시켰다. 미국은 1776년 처음 건국한다. 남북전쟁 종료 후 1865년의 연방 재통합은 제2건국이다. 미국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미국 게티즈버그, 찰스턴, 워싱턴, 리치먼드, 애포머톡스, 매너서스, 애틀랜타에서]
글·사진=박보균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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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SCENT OF MONEY  / 돈의 힘

HUMAN BONDAGE / 2부 지불약속


제작 : chimerica Media (영국 2008 - BBC방영)


사람들은 대통령이나 의회의 수상이 권력을 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권력은 소수의 엘리트집단이 쥐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 채권시장을 좌우하는 이들이죠. 빌 그로스는 세계최대의 자산운용사인 핌코의 회장입니다. 이 회사는 무려 7조 달러나 되는 금융자산을 운용하고 있죠. 사람들은 그를 채권시장의 황제, 미스터 본드라고 부릅니다.


채권 (정부 혹은 은행이나 회사가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차입하기위해 발행하는 유가증권)


00:00:50:00

채권은 금융거래시장과 정치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입니다. 정부는 징수한 세금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경우 채권을 팔아서 그 차액을 메우죠.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구입한 채권을 처분하고 싶을 때에는 금융거래 시장에 그 채권을 내다 팔면 됩니다.


금융의 역사에서 채권시장의 탄생은 은행의 대두 다음으로 큰 혁명이었습니다. 정부가 돈을 빌릴 수 있는 새로운 창구가 열린 것이죠. 약 600년 전 이탈리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채권시장은 전쟁자금을 지원하게 됩니다. 채권시장은 워털루전쟁의 승패를 결정했고 세계적인 금융가문을 탄생시켰습니다. 미국 남부전쟁에서 남부가 패한 원인이기도 했죠. 아르헨티나와 같은 부국을 무릎 꿇게 했을 정도로 채권시장의 힘은 막강합니다.


00:02:02:00

오늘날 세계 각국의 정부와 회사들은 채권을 담보로 엄청난 돈을 빌리고 있습니다. 약 85조 달러의 채권이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죠. 우리의 운명은 채권시장에 달렸습니다. 채권시장이 포화상태가 되면, 자산가치가 높은 집값은 하락합니다.  2007년 여름 전 세계에 강타한 경제위기, 이런 혼란 속에서 미국의 국공채는 투자자들의 안전한 은신처가 됐습니다.


만약 빌 그로스가 채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다면 세계경제는 그야말로 원자폭탄을 맞을 것입니다. “빌 그로스”는 영화 007에 나오는 제임스본드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명의 본드에게는 일종의 살인면허가 있는 셈이죠.


00:03:15:00

THE ASCENT OF MONEY  / 돈의 힘

HUMAN BONDAGE / 2부 지불약속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을 두고 모든 것들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채권시장을 낳은 것도 바로 전쟁이죠. 피렌체와 피사, 시에나 등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들은 중세 대부분을 전쟁 속에서 보냈습니다. 전쟁의 원인은 인간의 탐욕과 돈 이였죠.


 

피에르 반 헤이든 <돈 자루와 궤의 전쟁>

00:04:00:00


 

 

피에르 반 헤이든의 판화 “돈 자루와 궤의 전쟁”에는 돼지 저금통과 보물 상자, 동전이 가득한 자루들이 창과 칼 사이에 어지럽게 놓여있습니다. 그림에는 이런 문구도 적혀있습니다. “이 전쟁은 돈과 재물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돈이 없다면 전쟁도 없다.”는 뜻이겠죠.


채권시장을 통해 전쟁자금을 지원하는 방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최대발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르네상스시절 도시국가들은 주변국의 영토와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서 콘도티에리(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용병징집인) 즉 “용병징집인”을 고용했습니다. 1360대와 70년대 활동했던 콘도티에리 중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피렌체대성당에 전시된 이 그림 속 인물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영국 잉글랜드 에스엑스 출신인 그는 타고난 전쟁광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를 존 호크우드경 이탈리아어로 <지오바니 아큐터>라고 불렀죠.


이 성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그에게 피렌체 사람들이 보상명목으로 제공한 부동산 중 하나입니다. 호크우드는 용병이었기 때문에 돈만 받으면 누굴 위해서든 싸웠습니다. 밀라노, 파도바, 피사 등 도시국가들은 물론 교황까지도 그를 고용했죠.

 


00:06:00:00

피렌체 <베키오 궁전>에 전시된 이 그림은 1364년 피사와 피렌체의 전쟁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당시 호크우드는 피사의 용병대장 이었지만 15년 후에는 돈을 받고 피렌체를 위해서 싸웁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위기에 처합니다. 이들 국가들의 지출은 해마다 두 배로 늘었고 시민들이 내는 세금도 마찬가지였죠. 또한 용병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느라 늘 적자에 허덕였습니다.

 

피렌체의 공문서 보관되어 있는 이 자료에 따르면 14세기 5만 플로린(플로린화:13세기 피렌체에서 통용되던 금화)에 이르던 시의 부채가 1427년에는 500만 플로린으로 늘었다고 합니다. 부채가 산더미처럼 쌓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부채를 어떻게 충당 했을까요? 답은 바로 피렌체 시민들에게 있습니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대신에 시민들로부터 돈을 빌렸던 것입니다. 물론 의무적으로 말이죠. 시민들은 이러한 강제성을 수반한 대부에 대한 대가로 이자를 받았습니다. 장부에 적힌 이 부채의 목록이 바로 정부 채권입니다. 당시 정부채권은 유동자산으로 급전이 필요할 때면 팔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죠. 이 장부는 피렌체정부가 시민들을 어떻게 투자가로 변신시켰는지를 보여줍니다.

00:08:05:00

채권은 도시국가의 파산을 막았고 시민들은 이자를 받아서 모두에게 남는 장사였죠. 채권시장은 시민들의 거래를 허락했습니다. 그러자 공공채무가 정리된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이 멋진 발생에도 치명적인 결점은 있었습니다.


아무 이득이 없는 전쟁을 계속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부채가 늘자 채권을 더 많이 발행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채권의 가치는 떨어졌습니다. 결국 베네치아에서 사건이 터졌습니다. 16세기 초 베네치아에서는 군인들이 여러 차례 폭동을 일으켰는데 그 일로 베네치아의 채권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1509년부터 29년까지 베네치아의 몬테누에보 채권은 액면가 10%에 거래됐었습니다. 전쟁 중에 채권을 사려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정부가 원금이나 이자를 지급하지 못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채권은 액면가에 따라 이자가 지급되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액면가의 10%만 지불하고도 이자를 50%까지 받을 수 있죠. 이것이 바로 채권시장의 원리입니다. 위험을 감수할 용기만 있다면 원금을 회수 할 수도 있는 것이죠. 또한 금융시장 전체 이자율을 결정하는 것 역시 채권시장입니다.


르네상스시절 전쟁자금을 위해 고안된 채권이 전체 금융이자율까지 좌지우지하게 된 것입니다.

패권의힘이막강해진것이죠.그후로도채권은전세계지배하고있습니다.                                                                                                                        

00:10:38:00

<로스차일드가 저택>



워털루전쟁(1815년 6월 나폴레옹 1세가 이끈 프랑스군이 영국, 프로이센 연합군과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에서 벌인 전투) 승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금융재벌의 저택입니다. 이 가문은 자타가 공인하는 금융황제를 배출했죠. 그는 19세기 채권시장의 진정한 황제였습니다. 엄청난 부를 소유했던 네이선은 자신이 전쟁과 평화의 중재자라고 큰 소리 쳤습니다. 또한 국가의 신용이 자신의 손에 달렸다고도 했죠.

 



 

 

이는 뛰어는 채권거래상이자 훗날 세계최대 은행의 주인이 될 네이선 로스차일드(Rothschild)를 두고 1828년 영국의회의 급진파 의원이었던 토마스 돈스컴이 했던 말입니다. 채권시장은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엄청난 부를 선사했습니다. 이들은 유럽전역에 걸쳐 41채나 되는 저택을 소유했을 만큼 큰 부자였죠. 버킹험셔에 위치한 이 저택은 현재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4대손인 제이콥 로스차일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 네이선 로스차이드 (로스차일드 집안의 창시자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셋째 아들)


* 제이콥 로스차일드

“4대 조부는 영리한 분이셨습니다. 욕심도 많았습니다. 늘 무엇인가에 집중하셨는데, 함께 있으면 늘 즐거운 사람은 아니었죠.”


1810년부터 1836년 사이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다섯 아들들은 국제금융계의 거물로 급부상합니다. 영국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을 일으킨 장본인은 셋째아들 네이선이었습니다. 네이선의 고손자인 에블린 로스차일드는 네이선이 설립한 은행의 회장직에서 최근에 물러났습니다.


*에블린 로스차일드

“고조부는 야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영국으로 이주하셨죠. 어리석음이 싫어하셨는데 우리가문의 내력이죠.”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형제들에게 편지입니다. 그는 누가 보지 못하게 항상  주덴도이치(히브리 문자를 사용한 독일어로 우편물의 내용을 엿보는 걸 막기 위해 사용했음)로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보면 그가 형제들에게 직업정신을 심어주고자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몇 줄 읽어드리죠.


“사랑하는 큰 형님, 형님에게 편지로 제 생각을 전하는 일은 제 의무입니다. 형님은 아실 거예요. 저는 지금까지 줄곧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뒤 흔히 하는 독서나 카드놀이, 영화감상 같은 취미생활을 하지 않았어요. 저의 유일한 즐거움은 <사업>뿐이죠”


00:13:42:00

열정과 타고난 경제적 감각을 바탕으로 네이선은 게토의 무명인이서 런던 채권시장의 황제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금융시장이 비약적으로 발전을 하게 되는데 역시 전쟁을 통해서였죠.


1815년 6월 18일 아침 영국과 네덜란드, 독일병사 6만 7천여 명이 영국의 웰링턴공작의 지휘아래 벨기에 남동부에 위치한 워털루에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대가 진격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죠. 워털루 전투는 영국과 프랑스간의 갈등이 절정에 이른 결과로 두 나라 금융제도의 우열을 가르는 전투였습니다. 전쟁자금을 약탈에 의존했던 프랑스와 채권에 의존했던 영국의 금융싸움이었죠.


전쟁비용을 마련하기위해 영국정부는 전례 없는 엄청난 양의 채권을 발행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백만장자가 된 것은 워털루전투의 승패가 채권가격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00년 후 나치독일은 이 유대인 가문의 부당 이익을 폭로하기 위해서 영화 <로스차일드家>의 상영을 허가 합니다. 영화에 따르면 네이선은 프랑스장군을 매수해 영국군의 우세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나서 영국군이 열세라고 런던에 헛소문을 퍼뜨리죠. 놀란 영국인들이 헐값에 영국채권을 처분하자 네이선은 서둘러서 채권을 사 드립니다.


하지만 1815년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워털루전투에 대한 거짓정보를 흘려서 큰  돈을 벌 것으로 예상을 했는데 오히려 최대 위기를 맞습니다. 당시상황에 대해 설명해 드리죠. 영국정부는 채권판매로 엄청난 현금을 보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웰링턴 공작에게 채권은 쓸모가 없었죠. 군인들에게 급료를 주고 동맹군에게 사례금을 주려면 언제어디서나 지불가능한 통화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채권시장에 빌린 돈을 금으로 바꿔 웰링턴 공작에게 전달합니다. 이를 계기로 전쟁당사국들은 물론 전 유럽의 운명이 바뀌었죠.


이 편지 한 장이 영국정부와 로스차일드가의 운명을 바꿔났습니다. 1814년 1월 11일 영국의 재무장관은 영국군 총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서 네이선 로스차일드를 영국정부의 대리인으로 임명할 것을 명령합니다. 네이선의 임무는 유럽대륙에서 금과 은을 최대한 많이 모아 프랑스 남부로 진격중인 웰링턴 공작에게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네이선은 유럽전역에 뻗어있던 로스차일드가문의 신용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됩니다.


00:17:30:00

전쟁 중에 많은 양의 금을 운반하려면 그만큼 위험부담이 큽니다. 하지만 로스차일드가문은 위험한 만큼 고액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어서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죠. 곧이어 이들 가문은 영국정부의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로 부상합니다.


영국군 총 사령관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자신의 임무를 존경스러울 만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를 믿는다.”


로스차일드는 가족중심의 은행 네트워크를 구축해 전쟁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셋째아들 네이선은 런던에 장남 암셀은 프랑크푸르트에 막내 제임스는 파리에 넷째 칼은 암스테르담에 있었고 둘째 살로몬은 유럽을 오가며 작전을 도왔습니다.


예를 들어 파리의 금값이 런던보다 비쌀 때는 파리에 있는 막내 제임스가 금을 팝니다. 그 다음에는 런던에 있는 네이선이 사는 방식이죠.


* 제이콥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 가문이 금융시장에서 우위를 차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럽의 금융요지에 형제들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금융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충분히 활용했던 것이죠. 어쨌든 세계를 좌우 할 정도로 막강한 금융네트워크를 구축한 점은 놀랍습니다.



1815년 3월 나폴레옹은 유배지인 엘바섬을 탈출해  파리로 돌아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시 금괴와 은괴 동전을 사 모으기 시작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폴레옹이 주도한 이전의 전쟁들이 그랬듯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결국 사람들은 금을 찾을 테고 당연히 가격도 오를 테니까요.


하지만 이는 엄청난 계산착오였습니다.


 

00:20:00:00

하루 동안의 치열한 공격과 반격 끝에 프로이센 군대가 합세하면서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었습니다. 웰링턴 장군은 명예로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반면에 로스차일드가는 아니었죠.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발 빠른 정보망을 통해 나폴레옹의 패배소식을 접하고 기뻤겠죠. 그는 영국내각에 공식보고가 전해지기 이틀 전에 이미 승전보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승리는 네이선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무용지물이 된 금(金)을 싼값이 샀을 뿐이니까요. 전쟁이 끝난 뒤 그와 형제들은 아무도 원하지 않은 금더미위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군대는 해산될 것이고 군인들에게 금을 지불 할 필요가 없게 되어 치솟았던 금값이 폭락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엄청난 손실을 눈앞에 두고 네이선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해결책은 오직 하나, 로스차일드 가문의 금을 이용해 도박을 하는 것이었죠. 바로 채권시장을 통해서 말입니다.


1815년 7월 20일 런던 코리어신문은 네이선이 공채를 대량으로 매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영국정부의 채권을 사 들였다는 뜻이죠. 워털루 전투의 승리로 영국의 채권가격이 치솟을 것이라는 예측에 네이선은 승부수를 띄었습니다. 채권이 대량매입으로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자 네이선은 계속해서 채권을 사들였습니다.


채권을 팔라는 형제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렸죠.  그 후 일 년이나 계속해서 말입니다. 1817년 7월 채권가격이 40%까지 상승하자 네이선은 채권을 되팔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가 남긴 시세차익은 현재로 치면 6억 파운드에 이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채권을 사고팔아 이익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00:22:38:00

돈은 곧  권력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죠. 메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다섯 아들들에게 사랑받기보다는 사람들이 너희들을 두려워하도록 만들라고 당부했습니다. 실제로 19세기 중반의 금융권을 지배하는 동안 로스차일드 가문은 존경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됐죠. 지금은 증오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반유대주의의 편견을 자극했기 때문이죠.


* 제이콥 로스차일드

“포스터를 수집하는 동료가 몇 달 전에 반유대주의를 표방한 아주 독특한 포스터를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 로스차일드 가문을 남을 괴롭히는 지독하고 못된 사람들로 표현했더군요. 유대인들이 행했던 자본주의 경제활동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한 포스터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로스차일드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막기도 하는 그들의 양면성 때문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이 필요했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부를 창출했으니까요. 전쟁이 없었다면 19세기 국가들은 채권을 발행 할 필요도 없었겠죠. 그런데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전쟁자금을 마련하려면 정부는 엄청난 빚을 지게 되고 만약 빚을 갚지 못하면 이미 발행한 채권에 문제가 생기고 말죠. 19세기 중반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펀드 매니저가 되어 국공채를 관리합니다. 그로인해서 전쟁을 통해 얻는 득보다 실이 많게 되죠.

00:24:35

로스차일드 가문은 돈의 힘으로 워털루전투에서 영국에 승리를 도왔고 미국 남북전쟁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채권시장의 황제가 전쟁의 조정자가 된 것>이죠. 워털루 전투가 끝나고 50년 후 지구 반대편에서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역시 배후에 채권 시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채권시장을 믿고 승부수를 던진 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패하고 맙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2년 뒤인 1863년 6월 미국 <남북전쟁>(1861년에서 1865년까지 미합중국의 북부와 남부가 4년에 걸쳐 벌인 내전內戰)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북군은 미시시피 주의 수도였던 잭슨을 점령하고 남군을 서쪽의 피츠버그까지 후퇴시킵니다.  북군에 포위된 채 끈질기게 저항하던 남군은 결국 한달 만에 항복을 하고 맙니다.


피츠버그 전투 후 미시시피 강은 북군의 손에 넘어갔고 남군은 동서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남군이 패한 결정적인 요인이 피츠버그에서의 후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패전의 진짜이유는 재정문제였습니다.


 

 

00:26:45

피츠버그에서 하류로 내려가면 미시시피 강과 멕시코 만이 만나는 곳에 뉴올리언스 항이 있습니다. <파이크 요새>입니다. 영국의 공격으로부터 뉴올리언스를 지키기 위해 1812년에 세운 것이죠. 하지만 50년 후 북군이 뉴올리언스를 공격했을 때 요새는 그만 함락당하고 맙니다. 당시 뉴올리언스는 남부의 주력 수출품인 목화의 판로였기 때문에 손실이 아주 컸죠.


 

목화무역을 주도할 수 없게 되자 남부의 운명은 달라졌습니다.  목화는 채권시장을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수단이었기 때문이죠. 500여 년 전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처럼 남부 연합은 시민들에게 채권을 팔아 전쟁비용을 충당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남부의 자본은 한정되어 있었죠. 궁리 끝에 남부 연합은 유럽최대의 금융가문인 로스차일드 가문에 손을 내밉니다.


남부 연합이 이를 낙관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뉴욕의 로스차일드 대리인이 새롭게 당선된 링컨대통령에게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로스차일드가는 남부 연합의 손짓에 주저했습니다. 남부에 돈을 빌려줄 수도 있지만 이미 가치를 상실한 난부의 채권을 사들이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으니까요. 결국 로스차일드가는 나서지 않기로 결정했죠.

 

00:29:00

궁지에 내몰린 남부 연합은 새로운 작전을 구상했습니다. 바로 목화를 이용하는 것이었죠. 남부는 목화를 채권 지불 담보물로 내놓았습니다. 이자를 지불하지 못할 경우 목화로 대신하겠다며 투자자들을 안심시켰죠. 결국 남부의 대리인들은 남부 연합의 채권을 팔기위해 유럽의 주요도시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유럽의 금융요지를 중심으로 채권을 팔기위해 노력했지만 투자자들은 거들 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프랑스의 한 무명회사가 목화담보채권을 시장에 내 놓자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회사 채권을 목화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것도 전쟁 전 가격으로 말입니다.


<목화담보채권>은 남부의 새로운 전략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목화의 공급을 제한 할 경우 목화와 채권의 가격이 동반상승할 테니까요. 이제 남부 연합은 목화로 영국을 위협하기에 이릅니다.


00:30:40

1860년 영국의 리버풀 항은 섬유산업에 필요한 목화를 수입하는 주요 관문이었습니다. 당시 리버풀로 들어오는 목화의 80%는 미국 남부에서 생산된 것이었죠. 목화의 중요성을 안 남부 연합은 리버풀로 향하는 모든 선박의 출항을 금지했습니다. 영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죠. 결국 남부의 의도대로 목화 값이 치솟았고 남부 연합의 목화담보채권도 덩달아 가격이 올랐습니다. (남부 연합의) 출항금지조치는 영국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방직공장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해야 했습니다. 결국 1862년에 모든 방지공장이 가동을 멈췄습니다.


 맨체스터 남부 스타이얼에 위치한 이 방직공장에는 노동자 400여명이 근무했는데 목화가 없으니 당연히 할 일이 없었겠죠. 결국 공장노동자 절반가량이 해고됐고 지역주민 중 1/4정도가 빈민구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태를 두고 <목화기근>이라고 불렀지만 이는 인위적인 기근이었던 것이었죠.


00:32:15

영국경제는 침체에 빠졌고 목화담보채권의 가격은 계속 상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부 연합이 채권시장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면 투자자들이 채권의 이자를 지급받지 못할 경우 남부가 나서서 목화소유권을 보장해 준다는 전재조건이 필요했습니다.


앞서 1862년 4월 28일 뉴올리언스가 함락되었을 당시 미국 남북전쟁이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결국 남부의 주요항구가 북부군의 손에 들어가자 목화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 투자자들은 북군 해군의 철통같은 봉쇄선을 뚫어야 했습니다.


남부 연합이 목화공급을 중단하자 1863년 랭크셔의 방직공장들은 중국과 이집트 인도지역에서 새로운 목화공급원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목화담보채권 투자자들의 신뢰와 남부경제가 동시에 붕괴되었습니다. 목화공급능력을 과시했던 남부 연합이 보기 좋게 무너진 것이죠.


00:33:35

 


국내채권시장이 몰락하자 당장 전쟁자금을 지급해야 했던 남부 연합은 루이지에나 주립박물관에 있는 이러한 지폐들을 마구 찍어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남부 연합은 총 17억 달러를 발행했다고 합니다. 북부 연합도 지폐를 발행했는데 전쟁의 막바지에
북부의 그린백이 장당 50센트였다면 남부의 그레이백은 1센트에 불과했죠. 결국 남부는 그 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1865년 1월에는 물건 값이 기존가격에서 90배로 치솟기도 했습니다.


승부를 채권시장에 걸었던 남부는 결국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하지만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몰고 온 이같은 무모한 시도는 그 후로도 계속 반복됩니다.


00:34:40

오늘날의 채권시장은 전 세계 주식시장을 합한 것 보다 그 규모가 큽니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기도 하죠. 채권시장의 황재라 불리는 이 사람이 한때 라스베이거스에서 활약했던 카드선수였던 사실을 아십니까?



 

 

빌 그로스 (채권펀드사 핌코 회장)

“전 블랙잭 선수였는데 최초의 직업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꽤 잘 나갔죠. 라스베이거스를 정복하고 싶어 60년대 말부터 카드 플레이어로 몇 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빌 그로스는 현재 채권시장의 황제가 되어 거액의 채권펀드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빌 그로스의 채권거래는 금융시장과 정부를 비롯해서 연금기금과 주택담보대출 이자율에도 영향을 주죠. 하지만 세계금융시장을 호령하는 황제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인플레이션입니다.


*인플레이션 :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상승하는 경제현상

인플레이션이 위협적인 이유는 채권의 고정이율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빌 그로스 (채권펀드사 핌코 회장)

“예를 들어 물가가 10% 상승했는데 고정이율의 가치가 5%밖에 안 된다면 채권소유자들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5%나 손해를 보는 것이죠.”


그렇게 때문에 인플레이션 초기에 채권가격이 하락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폭락을 지속하기도 합니다.


인플레이션이라는 고약한 녀석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악화되는지 궁금하시다면 <아르헨티나>를 예로 들어보죠.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1946년 2월부터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이시기에 대통령에 선출된 후안 페론(아르헨티나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세 차례에 걸쳐 대통령을 역임)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앙은행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은행의 넘쳐나는 금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은행전체가 금으로 가득해 걷기조차 힘들다니...”


아르헨티나는 은의 땅이라는 뜻으로 부와 풍요를 상징합니다. 수도를 따라 흐르는 리오델라플라타강 역시 “은의 강”이란 뜻이죠.


00:37:15

한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영국의 최고급 백화점인 해로즈(HARRODS)백화점이 있었습니다. 1912년에 설립된 헤로즈백화점은 아르헨티나의 화려한 과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와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의 차액이 불과 18%밖에 되지 않았던 그런 시절도 있었죠. 결론적으로 말해 아르헨티나와 같이 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금융위기가 반복되면 망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경우입니다.


아르헨티나는 금융위기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하지만 1989년의 위기는 과거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죠.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2월초였는데도 전례 없는 더운 날씨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턱없이 부족했던 아르헨티나의 전력설비 때문에 정전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하지만 정전사태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죠.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금융파국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징수한 세금보다 정부의 지출이 과다한 경우입니다. 전쟁이 원인일 때가 많죠. 아르헨티나는 1970년대 내전과 1982년 포클랜드 제도를 둘러싼 영국과의 전쟁이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1989년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오죠.


00:39:35

2월이 되자 물가가 10%나 상승했습니다. 불과 한 달 만의 일이었죠. 정부는 은행을 폐쇄하고 이자를 낮추는 등 환율폭락을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효과는 없었죠. 한 달 만에 아르헨티나의 화폐가치는 달러에 비해서 140%나 하락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르헨티나정부가 공공부문의 적자해소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세계은행은 대출을 동결했습니다. 세계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게 되자 아르헨티나 정부는 공채를 발행해 재정적자를 메우려했습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인플레이션으로 몇 일 후면 휴지조각이 될 채권을 살 생각이 전혀 없었죠.


결국 아르헨티나 정부는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00:40:45

그해 4월 한 슈퍼마켓이 물건값을 30% 올리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분노했고 쇼핑카트를 부수기까지 했죠.

진열장은 텅 비었지만 가게주인들은 새 물건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당시상황은 정말 끔찍했어요. 같은 물건인데 아침저녁이 달랐어요. 손해를 볼까봐 팔수도 없었죠. 적당한 가격에 팔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오르는 거예요. 하루에 서너 번 이상 가격이 올랐었죠.”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국공채 가격이 폭락했습니다. 외채도 빌릴 수 없고 누구도 채권을 사려하지 않자 절망에 빠진 아르헨티나 정부는 중앙은행을 통해 화폐를 더 많이 발행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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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 금요일 마침내 아르헨티나의 국고가 바닥났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 중앙은행 부총재는 “이것은 물리적인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죠? 즉 아르헨티나 조폐국에 종이가 떨어져서 더 이상 돈을 찍어낼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부총재는 월요일면 화폐가 발행 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하지만 화폐를 찍어 낼수록 돈의 가치는 하락했고 정부는 점점 액면가 높은 돈을 발행 할 수밖에 없었죠.


 

 

5월에는 커피한잔의 값이 일주일 만에 50% 올랐고 신발 세 켤레가 소 한 마리 가격과 맞먹기도 했습니다.


1989년 6월 아르헨티나의 물가상승률은 100%에 육박했습니다. 1년에 12,000%가 상승한 것이죠. 예를 들어 5월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식당에서 음식 값으로 10,000 아우스트랄(1985년 아르헨티나에서 통용되던 화폐의 단위)을 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럴 경우 6월에는 20,000 아우스트랄을 그 다음달에는 60,000 아우스트랄을 지불해야만 했죠. 이렇게 지폐를 양 손 가득 들고 나가야 저녁 한 끼를 해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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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시민들은 이틀에 걸쳐 폭동을 일으켰고 굶주리다 못해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매 끼를 스테이크와 와인을 곁들어 먹던 이들이 부엌에서 스프로 끼니를 때우거나 굶어야 했습니다.


하이퍼인플레이션(물가상승이 통제를 벗어난 격심한 인플레이션 상태)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일당을 현금으로 받는 근로자들이었습니다. 매달 고정 급료를 받는 공무원들도 피해를 봤죠. 연금 수령자들과 투자금의 이자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채권 소유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현금이 필요했던 중산층은 보석과 식기들까지 내다팔기 시작했는데 당시 골동품을 파는 가계들이 지금도 성업 중입니다.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영국의 경제학자로 <케인즈경제학>이론을 창시함)는 채권소유자들의 안락사를 예언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금융재벌들의 부를 잠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전 세계를 휩쓸던 1970년대에는 케인즈의 주장이 사실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채권황재는 물론 채권 소유자는 보란 듯이 소생했습니다. 채권시장이 부활하자 놀란 미국의 관리들은 방금 찍어낸 새 채권을 팔아 <구제금융>에 투입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이 같은 채권황제의 부활은 채권투자자들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600년 전 채권시장이 탄생했던 이탈리아로 다시 가 볼까요?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노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입니다. 노령화 사회에서는 채권과 같이 수익이 고정된 채권이 주로 거래됩니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이 연금과 예금의 실제 가치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걱정이 큽니다. 그러므로 인플레이션에 관대했던 중앙은행은 채권시장에 그 해결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또한 정부가 금융위기로 파산한 은행들을 구제할 계획이라면 신중해야 합니다. 채권을 팔아 국고 재원을 확보할 생각이라면 말이죠.


현대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처럼 정치권력과 금융시장 사이에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진정한 지배자는 “비스터본드”나 “채권시장”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것보다 특정주식에 투자하는 것을 선호하십니까? 과연 어느 쪽이 위험성은 낮으면서 수익성이 높을까요? 다음 편에서는 주식시장의 거품과 붕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왜 금융사(金融史)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 또한 설명해 드리죠.


THE ASCENT OF MONEY  / 돈의 힘

HUMAN BONDAGE / 2부 지불약속

출처 : Eyes Only
글쓴이 :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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